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방위군 사건 (문단 편집) == [[죽음의 행진|죽음의 행렬]] == 당시 작전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1만 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이나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광역시|부산]] [[구포동(부산)|구포]]'라는 작전명만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 그리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 군수에게 육군 본부로부터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 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안 되었고 내무부는 지방 행정기관에 양곡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는 국방부와 내무부간 알력 싸움이었다. 당시 국군과 경찰은 앙금이 깊은 사이였는데[*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 제국 경찰|일본 경찰]]이었다. 당연히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사 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으니... 문제는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그대로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가 경찰이 돼버린 셈이다. 일본 순사들이 대한민국 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분통이 치민 이들은 모조리 국군, 특히 육군으로 입대했고 이후 경찰과 육군은 '''[[영암사건|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가 되었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고 지금 시선에서야 둘 다 친일파라고 하겠지만 [[일본 제국 육군|일본 육군]], 만주군의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한 이들이 대민 마찰을 일으킬 일은 적었다. 따라서 당시 관점에선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는 친일파로 안 봤다. 당장 '경찰 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주역인 [[남로당]] 김지회조차 왕년의 일본 육군 [[소위]]였다.] 경찰은 내무부 소속이었으므로 내무부가 국방부에게 곧이곧대로 협조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 끼니는 제대로 해결될 리 없었고, 심지어 인민군 휘하 의용군 대접만도 못할 정도였다.[* 내무부의 비협조 말고도, 전시 상황인 탓에 '''진짜로 양곡이 없어서''' 아예 면장, 읍장들이 텅 빈 양곡창고를 구경시켜 주는 일도 즐비했다.] 북한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했던 [[서태원(1923)|서태원]][* [[4.19 혁명]] 이후 민의원 역임.]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 ''''거지 중의 상거지''''란 표현은 다른 국민방위군 경험자 및 목격자 증언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관용구다.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그것도 당시 유례 없는 혹한이었는데[* 이 당시 북한 지역으로 밀고 갔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중공군과 싸우는 한편 [[장진호 전투|동장군하고도 싸우고 있었다]].] 소집된 장정들은 상식적으로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 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차량 따위는 없었다. 무조건 도보행군. 또한 국도는 UN군이 작전도로로 통제하므로 제2국민병들은 샛길이나 산길을 타고 이동하여 피로가 더욱 극심하였다. 따라서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고 교실 하나에 수백 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질병이 창궐하여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 문제는 이 행군이 국민방위군이 겪은 고난의 전부가 아니란 것이었다. 제주도 교육대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간신히 교육대까지 도착한 장정 중 3천 명이 체력 부족이라고 돌려보냈는데 그냥 인근 마을에 눌러앉아 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국민방위군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끌려갔던 본 기여자의 할머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그분은 행렬 중에 모처 다리의 노점상에서 고향사람과 함께 인절미를 사먹는 척 하고 쭈그려 앉아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방식으로 탈영에 성공했다고 한다. 얼마나 관리감독이 허술했는지, 아니 아예 없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군기와 담당자가 없어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군복도 입지 못했으므로 일반인과 구분되지 않아 대열에서 이탈만 하면 탈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경남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비교적 온화한 날씨와 절대적으로 짧은 동선 때문에 상기된 죽음의 행렬을 경험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헌병사령관 [[최경록]]은 1951년 1월 대구로 가는 길에 가마니를 뒤집어 쓴 군인들이 거지처럼 서성거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군기가 이 꼴이 되다니.' 하는 생각에 혼내주러 갔다가 오히려 그들의 안내를 받아 굶어 죽고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헌병사령관의 전시 주업무가 후방에서 군사적으로 치안유지를 하는 것인데, 이때서야 국민방위군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고는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조사하였다. 그리고 2차 수사의 주역이 되어 책임자 총살형에 큰 역할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